가볼만한곳

요지(窯址)란?

NewULife LEGENDARY 2006. 7. 26. 15:18

요지 (窯址)

요약
토기·질그릇·오지그릇·도자기·기와·벽돌 등을 굽는 가마가 있던 터. <가마터> 또는 <가마자리>라고도 한다.
설명
토기·질그릇·오지그릇·도자기·기와·벽돌 등을 굽는 가마가 있던 터. <가마터> 또는 <가마자리>라고도 한다. 한국은 예로부터 요업의 원료가 되는 토석(土石)의 함유량이 많아 토기·도자기를 많이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그 질이 우수할 뿐 아니라 형태와 문양이 아름답고 독창성이 있으며, 중국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자기를 만들어 썼기 때문에 <자기의 나라>라고 일컬어졌다. 특히 고려시대에 요업이 매우 융성하였다. 고려시대 이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지방(백제)과 경주지방(신라)에 집중적으로 가마터가 있었는데, 거의 지하땅굴식 등요이다.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무렵부터는 중국 저장성[浙江省(절강성)] 일대에서 발달한 청자제조법이 수입되어 청자를 만들기에 이르렀으며, 지리적으로 중국문화의 파급이 용이했던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남해안 일대에서 먼저 발달하였다. 10세기 이후 고려청자는 급속도로 발달하여 12세기 중엽에는 거의 절정에 이르렀다. 몽골침입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질이 저하되었으나, 14세기에는 전국에 소규모의 가마가 많이 생겨났다. 고려 조정에서는 청자를 관용(官用)으로 사용하였으며, 요업에 대한 배려로 자기소에 제요직(諸窯直)·육요직(六窯直)이라는 관리를 두었고 관요지(官窯址)를 설치하였다. 당시의 관요지로는 판적요(板積窯)·월개요(月蓋窯)·남산요(南山窯)·귀정사도요(歸正寺陶窯) 등이 문헌에 나타난다. 10세기 말 무렵부터 14세기 이전까지는 요지가 강진(康津)과 부안(扶安)에 집중되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가마가 운영되었는데, 강진군 대구면(大口面)과 칠량면(七良面)은 고려청자 가마터가 남아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이들 도자기의 중심지는 각각 많은 요지군(窯址群)을 형성하고 있어서, 대구면에서만 약 100개소가 발견되었다. 강진과 부안의 요지는 가장 우수하고 유명하여, 이들에 대해서는 《이왕가미술관도록(李王家美術館圖錄)》을 비롯하여 여러 문헌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이미 백자시대에 들어가 있던 원(元)나라·명(明)나라의 영향으로 새로운 백자가마가 생겨났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청자가마는 점차 줄어들고 변형되어 분청사기를 생산하게 되었고, 백자가마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고려 말부터 일기 시작한 사기사용의 증대와 도자기 수요의 증가에 따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도자기 생산력의 향상을 위한 시책이 초기부터 시행되었고 제도적으로도 보장되었는데, 1392년(태조 1) 사선서(司膳署;뒤에 司饔房으로 개칭)를 설치하고, 1467년(세조 13) 사옹원으로 재정비한 뒤 조선 말기까지 존속시켰다. 사옹원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가 궁중에서 사용할 사기그릇을 구워 만들어 상납하는 일이었는데, 16세기에는 광주(廣州)에 사옹원의 분원이 설치되어 궁중에 바치는 사기그릇 만드는 일을 광주분원에서 전담하였다. 광주관요는 조선시대 도자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으로 광주 가마터의 조사·연구는 바로 조선의 백자를 연구하는 데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출처, 야후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