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유삼재(兪三宰). 신라 때 아찬(阿湌)을 지냈다. ‘을사보(乙巳譜)’에 보면 자(字)와 호(號) 등이 전해있지 않고 세차(世次) 역시 상세한 것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말에 유의신(兪義臣)이 신라의 세신(世臣)이라 하여 고려에 불복하자 그를 기계현 호장(杞溪縣戶長)에 항속(降屬) 시킴으로써 후손들이 그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지금 경북(慶北) 영일군(迎日郡) 기계고현(杞溪古縣)에 시조의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시조이래 상계(上系)의 세거지로 전해지고 있다. 이 유허비(遺墟碑)는 후손인 유한모(兪漢謨)가 정조 19년(1795) 경산부윤(慶山府尹)이 되었을 때 현지 고노(故老)의 말을 듣고 옛날에 유씨(兪氏)네가 사용했다고 전하는 우물터에 세웠다. 그러나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자손으로 그 이름이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는 유여해(兪汝諧) 이다. 유여해(兪汝諧)는 세계상(世溪上) 유의신(兪義臣)의 증손으로 되어있으나 사실은 유의신(兪義臣)으로부터 3백여 년 뒤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동안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 되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고려사’(高麗史)에 보면 “최항(崔沆)이 하동감무(河東監務) 노성(盧成)을 죽이다. 노성(盧成)이 급제(及第), 유여해(兪汝諧) 등과 더불어 시(詩)를 지어 최항(崔沆)을 비방하였다하여 마침내 노성(盧成)을 죽이고 유여해(兪汝諧) 등은 해도(海島)에 유배시켰다” 고 기록되어 있다.
본관지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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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현(杞溪縣)은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에 있던 지명이다. 본래 신라의 모혜현(芼兮縣-化鷄縣)을 경덕왕이 기계로 고쳐 의창군(義昌郡) 영현이 되었다. 1018년에 경주(慶州)로 이속했다가 후에 없앴다. 중요 성씨로는 유(兪)ㆍ가(李)ㆍ윤(尹) 씨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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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명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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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공파(同正公派)ㆍ전서공파(典書公派)ㆍ군기사사공파(軍器寺事公派)ㆍ부정공파(副正公派)ㆍ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ㆍ신계공파(新溪公派)ㆍ단성공파(丹城公派)ㆍ충목공파(忠穆公派)ㆍ진사공파(進士公派)ㆍ자산공파(慈山公派)ㆍ학생공파(學生公派)ㆍ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ㆍ주부공파(主簿公派)ㆍ월성군파(月城郡派)ㆍ장위랑공파(장위랑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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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세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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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유씨(杞溪兪氏) 상계(上系)의 세거지라 하여 시조의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진 것으로 보아 일찍이 경북 영일군(迎日郡)의 기계에 터를 잡아 세거했다고 믿어진다. 유여해(兪汝諧)의 자손가운데 유형무(兪逈務)의 자손들인 동정공파(同正公派)는 유형무(兪逈務)의 증손 유선(兪善)의 후계(後系)가 충남 연기(燕岐)땅을 세천지(世阡地)로 지키고 있으므로 그곳에 세거했던 것 같고, 유선(兪善)의 동생인 유신(兪信)의 후계(後系) 개성(開城)과, 양주(楊州)ㆍ충주(忠州)ㆍ중원(中原)ㆍ음성(陰成) 등지에 산거(散居) 했다고 믿어진다. 또한 유형무(兪逈務)의 현손(玄孫)인 유동노(兪東老)의 대이래로 일부는 충남 당진(唐津)에 정착하였던 것 같다. 전서공파(典書公派)는 일부가 유천경(兪千慶)의 6대손 유영(兪英)의 대를 전후하여 전북익산(益山)에, 유천경의 7대손유사달(兪嗣達)ㆍ유사원(兪嗣元)의 대이래로 충남 논산(論山), 경북위주(藯州)의 언양(彦陽)등지에, 유천경의 증손유세걸(兪世傑) 이래로 경북 영일(迎日)의 오천(烏川)등지에 세거(世居)의 터를 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군기사사공파(軍器寺事公派)는 유성리(兪成利)의 손자인 유효통(兪孝通)의 후계(後系)는 경기ㆍ충청일원과 경상도에, 유효전(兪孝全)ㆍ유숙생(兪淑生)ㆍ유원기(兪元器)의 후손들은 충남논산(論山)ㆍ부여(扶餘), 황해도 해주(海州), 전남함평(咸平) 등지를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삼고 있으므로 대체로 이들 지역에 나위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유성보(兪成保)의 자손들인 부정공파(副正公派)는 충남 천안(川安)ㆍ천원군(天原郡) 일원, 경기도 평택(平澤)ㆍ화성(華城), 전남광주(光州) 등지에 많이 살았던 것 같다. 유성리(兪成利)의 동생인 유성복(兪成福)의 자손들은 가장 번창하여 유성복(兪成福) 이래로 8개파(派)로 분파(分派) 되었으며 후계유씨(杞溪兪氏) 전체의 75%를 차지하여 전국에 산거(散居)하였다. 특히 경기도안성(安城)ㆍ고양(高陽)ㆍ광주(廣州), 충북진천(鎭川)ㆍ보은(報恩), 충남 서천(舒川)의 비인(庇仁)ㆍ부여(扶餘)ㆍ청양(靑陽) 등지에 많이 살았다고 믿어 진다. 한편 주부공파(主簿公派)는 유덕주(兪德珠)의 아들유정(兪侹)의 대 이래로 경북 고령(高靈)에서 살다가 일부가 유정(兪侹)의 10대손인 유팽강(兪彭綱) 이래로 경남거제(巨濟)에 옮겨가 살았고, 그밖에 달성(達成)의현풍(玄風), 협천(陜川) 등지에도 일부 자손들이 살았던 것 같다. 월성군파(月城郡派)의 경우, 유승추(兪承樞)의 현손(玄孫) 유응부(兪應孚)가 세조조에 성삼문(成三門) 등과 함께 극형(極刑)에 처해졌으므로 그의 둘째 아들인 유사성(兪思誠)이 숙부 유응신(兪應信)과 함께 북쪽으로 가 화(禍)를 면하게 되었던 사실이 을기보(乙己譜)에 보인다. 이무렵부터 자손들이 함북일대에 세거하였던 것 같다. 유사성의 후계(後系)는 함북경흥에 유응신(兪應信)의 후계(後系)는 부녕(富寧)에 터를 잡았고, 그 중 일부가 명천(明川)ㆍ안변(安邊)을 거쳐 충남 대전(大田)으로 옮겨가 살았다고 믿어진다. 장위랑공파(將位郞公派)의 자손들은 경남함양(咸陽)등지에 살았던 것 같다. 그리하여 1930년경에 와서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자손들은 경기도 광주군중부면 (廣州郡中部面), 충남 연기군서면 (燕岐郡西面), 경북 봉화군중부면(奉化郡中部面), 경남 진양군내동면(晋陽郡奈洞面), 함북 부영군삼해면(富寧郡三海面) 관해면(觀海面) 경흥군풍해면(慶興郡豊海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 기후유씨(杞溪兪氏)가 처음 발을 들인 것은 임진왜란 무렵에 충목공유홍(忠穆公兪泓)이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왕자 임해군(臨海郡) 등과 함께 지원병 모집을 위해 강원도ㆍ함경도 등지로 출정하여 최초로 야영했던 곳이 바로 이 마을 검단산(黔丹山) 계곡이 었다고 한다. 유홍(兪泓)은 유성복(兪成福)의 6대손이며 유여임(兪汝瀮)의 손자. 후에 서울이 함락되고 유홍(兪泓)은 왕비를 해주(海州)로 피신시킨 뒤 그곳에서 별세했다. 그의아들 유대술(兪大述)과 유대건(兪大建) 형제가 아버지의 묘를 경기도 고양(高揚)에서 검단산(黔丹山) 기슭으로 이장하고 이마을에 터를 굳혀 살았던 것이 하산곡리 유씨 (下山谷里 兪氏) 마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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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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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유씨(杞溪兪氏)는 자고로 청족(淸族)이라 세상에 일컬어왔는데 사실기계유씨 (杞溪兪氏)의 역사를 훑어보면 이상할 정도로 탐관오리의 추명을 남긴이가 드물다. 매사에 중용을 집(집)하여 대체로 조촐한 선비의 관구(觀矩)를 넘지 않은 것이 시조이래 기계유씨 (杞溪兪氏)의 전통인 것이다. 권세를 일족의 수중에 모으고 국정을 좌지우지한 적이 없으므로 평범한 역사였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랑할만한 평범이요, 천양(闡揚)되어 마땅한 역사였다. 유(兪)씨는 창원(昌原)ㆍ인동(仁同)ㆍ장사(長泗)ㆍ강진(康津)ㆍ무안(務安)ㆍ고령(高靈) 등 여러본이 있으나 이중기계(杞溪)가 대종으로 유(유)씨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기계유씨(杞溪兪氏)는 고려 전기(전기)에는 벼슬에 뜻을두지 않고 여러대에 걸쳐 은둔생활을 했다. 고려조 후기에 이르러 일족이 경기도(京畿道)지방에 이주하면서 다시 벼슬에 뜻을 두어 유득선(兪得瑄)ㆍ유선(兪僐)ㆍ유승계(兪承桂) 등 3대가 기계유씨(杞溪兪氏)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유승계(兪承桂)의 아들 유천경(兪千慶)전서(典書) 성리(成利)군기사사(軍器寺事)ㆍ성보(成保)부정(副正)ㆍ성복(成福)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등 4형제가 고려가 망하기 전관직에 올라 이름을 떨쳤다. 조선조에 들어와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인물은 성리성리의 손자 유효통(兪孝通)이다. 그는 정인지(鄭麟趾) 와 함께 중과(重科)에 장원급제하고 세종(世宗)시대 집현전(集賢殿)의 제학(提學)이 되었으며 의학자로서 전의감정 노중예 (典醫監正盧重禮)와 더불어 향약채집월령 (鄕藥採集月令)을 서술했다. 향약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은 우리나라 약용식물을 맨처음 정리한 의서(醫書)로서 식물 이름을 우리말로 기입함으로써 일상에 알고 있는 약으로 손쉽게 쓸 수 있도록 했다. 유효통(兪孝通)은 그의 장자 유목노(兪牧老)의 부인이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의 딸이었던 관계로 황보인(皇甫仁)이 수양대군(首陽大君) 일당에 의해 참변을 당한 뒤 박해를 받았다. 같은 시대 기계유씨는 우리나라 역사상 충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사육신 (死六臣)의 한 사람인 유응부(兪應孚) 장군을 배출했다. 그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 평안도(平安道) 절제사를 거쳐 시중구원사 (知中樞院事)에 올랐다. 정이품(正二品)에 올랐던 1455년 성삼문(成三門)ㆍ박팽년(朴彭年) 등과 단종(端宗) 복위를 모의하고 명(明) 나라 사신을 초대하는 연회장소에서 세조(世祖)를 살해하는 소임까지 맡았으나 김질(金礩)의 배신으로 탄로되어 심한 고문에도 끝까지 지조를 지켜 숨을 거두었다. 세조(世祖)가 문신(文臣)을 친국(親鞠)할 때 장군에게 “너는 무엇을 하려 했느냐”고 물으니, 그는 “한칼로 조카를 죽이고 본임금을 복위시키려 했다”고 답했다. 세조(世祖)가 노하여 살가죽을 벗기고 부젓가락으로 살을 지지는 고문을 내렸으나 얼굴빛 하나 변치 않고 부젓가락이 식으면 “다시 달구어 오라”고 호통을 치며 끝내 굴복치 않았다. 학문과 무예를 겸비한 당시 의절파(義節派) 학자로 기골이 장대하고 활쏘기에 뛰어났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간밤에 불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까. 낙낙장송(落落長松) 다 기울어 지단 말까. 하물며 못다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그가 남긴 유명한 시귀절은 의절(義節)을 지킨 지성인의 고뇌를 대변한다. 유응부(兪應孚)는 벼슬이 재상의 반열(班列)에 이르러서도 청렴결백하여 항상 가난을 동반했고, 때로는 먹을 양식조차 끼니대기가 어렸웠다고 전해진다. 그가 죽던 날 가족들은 “살아 서 편히 산적이 없고 죽어서 대화(大禍)를 남겼다고”고 호곡했다는 것이다. 유응부는 숙종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과천(果川)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洪州) 노은서원(魯恩書院), 연산충곡서원(連山忠谷書院), 대구 낙빈서원 (大邱 洛濱書院) 영월장열사(寧越彰烈祠)에 제향되어 오늘날에도 그의 뜻을 기리는 후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유진(兪鎭)은 세조때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특히 이학에 깊었다.유호인 (兪好仁)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성종조에 과거에 급제, 호당(湖堂)에 뽑히고 벼슬이 교리(校理)에 이르렀는데 성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그는 특히 시문(詩文)에 능해 충효(忠孝),시문(詩文),율력(筆力)을 겸하여 삼절(三絶)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다. 유성복(兪成福)의 손자요 유효통(兪孝通)의 재종제인 유해(兪解)는 성삼문(成三門)의 아버지와 동서간이다. 그는 일찍이 세종(世宗)때 진사(進士)에 급제 하였으나 24세에 조졸(早卒)했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서 기계유씨를 명문청족(名門淸族)으로 발전시킨 것은 사실상 유해(兪解)의 자손들이었다. 그의 아들 유기창(兪起昌)은 성삼문(成三門)과 이종4촌인 관계로 화(禍)가 인척에까지 미쳐 젊어서는 도피생활을 하다가 성종(成宗)때 무과(武科)에 급제, 여러지방관(地方官)을 거쳐 첨지중추(僉知中樞)에 이르렀다. 그러나 연산조말(燕山朝末) 왕의 난폭한 정치를 간(諫)하다 죽은 영의정 성준(成俊)의 친당으로 몰려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다. 유기창(兪起昌)은 중종반정(中宗反正)후 조정에서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향리(鄕吏)로 돌아갔다. 연산 때의 사절신(四節臣)이라 일컬었다. 후에 충청도유림(忠淸道儒林)이 중심이 되어 충남서천군 비인면에 청절사(淸節祠)를 창건하고 유기창(兪起昌)과 그의 아들 유여임(兪汝霖)을 같이 배후(配享)하여 그청덕(淸德)을 추모했다. 후계유씨의중흥조 정당 유여임이 연산군(燕山君) 때 문과에 급제 중종반정후(中宗反正後) 벼슬길에 나서 사간(司諫)이 되었을 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그는 심연원(沈連源) 등과 함께 조정암(趙靜庵)과 더불어 같이 처벌해줄 것을 계(啓)하다 파직되었다. 그후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을 때 김안노(金安老)의 죄를 논핵하다가 도리어 파직되어 향리로 추방되었다. 7년후 그는 다시 기용되어 화조판서(禍曹判書)가 되었으나 얼마 후 별세했다. 유여림 은 천성이 담박하고 부귀영화를 꺼려 7년간의 은둔생활을 할 때도 평범한 촌노(村老)와 같았다한다. 그러나 조선조 중기 이후 이름을 빛낸 기계인은 거의가 그의 후손인 까닭에 그를 기계유씨의 중흥조라 일컫는다. 유여림의 아우 유여주(兪汝舟)는 중종때 조정암(趙靜庵)이 주장하여 설치한 현랑과(賢良科)에 선발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후 향리(鄕里)인 비인(庇仁)으로 낙향하여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의 부인 김(金)씨는 유여주(兪汝舟)의 아호를 따서 임벽당김(林碧堂金)씨라 하는데, 신사임당(申師任堂)ㆍ허난설헌(許蘭雪軒)과 더불어 조선조 3대 여류시인으로 꼽힌다. 유여림의 아들 유강(兪絳)은 호조판서숙민공 그의 손자요 유강(兪絳)의 조카인 유홍(兪泓)은 좌의정충목공 유강(兪絳)은 중종때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올랐으나 관로가 수탄치는 못했다. 그는 부정을 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이어서 당시 외척권신인 윤원형(尹元衡)을 논핵하다가 여러번 지방 관찰사로 축출되는 등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는데 윤원형이 죽은 뒤 중앙에 복귀하여 한성판윤ㆍ형조판서ㆍ호조판서를 지냈다. 유강(兪絳)은 스스로 “30년 입조(立朝)에 한번도 권세있는 집 문전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없다”는 말로써 자손들에게 올바른 몸가짐에 관한 교훈을 남겼다. 유홍(兪泓)은 명종(明宗)때 문과에 급제, 한림(翰林) 등을 거쳐 충청(忠淸)ㆍ전라(全羅)ㆍ경상(慶尙)ㆍ함경(咸鏡)ㆍ평안도(平安道) 등 오도관찰사(五道觀察使)를 역임했으며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나자 리판(吏判)ㆍ참찬(參贊)으로서 입상(入相)하여 좌의정에 이르렀다. 유홍은 시문(詩文)에도 능했으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그가 과거의 시관(試官)이 되었을 때 응시자 중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답안이 문과(文科)ㆍ소과(小科)에서 모두 뛰어났다. 그러나 시관(試官)의회에서 다른 모든 시관들이 이이(李珥)는 지난달 불문(佛門)에 들어갔던 과오가 있으므로 장원(壯元)을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유홍은 “옛날 성현들에게도 젊은 날의 과오는 모두 있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이이의 젊은 날의 일을 문제삼는다는 것은 오히려 여러분의 잘못이 더 크다”고 논박 마침내 율곡 이이를 장원(壯元)으로 뽑았다. 유홍은 광국1등ㆍ평난2등의 공훈으로 기성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유여림의 증손 중에서 유대수ㆍ유대진ㆍ유대기ㆍ유대정ㆍ유대일등이 출중하여 선조조와 광해조에 걸쳐 각각 크게 활약했다. 또 유홍의 손자 유백증(兪伯曾)과 유강의 증손 유성증(兪省曾)이 직간(直諫)과 충의(忠義)로써 이름을 떨쳤다. 유백증(兪伯曾)은 광해조 초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란정(亂政)에 벼슬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고 폐모(廢母)사건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갔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여 3등 공신이 되고 사간(司諫)에 특배(特拜)되었는데 이때부터 그의 논핵과 직간은 조정을 진동시켰다. 병자호란(丙子胡亂)때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하여 협수사(協守使)로서 대신들의 오국(誤國)을 통박하며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유성증(兪省曾)은 광해조 때 문과에 장원급제했으나 광해(光海) 말년에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서 이이담(李爾膽)을 공박하는 영남유생들의 소(疎)를 대작(代作)했다는 혐의로 하옥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때 풀려나기도 했다. 유성증(兪省曾)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강화(江華)의 파수대장(把守大將)으로 분전했으며 참의(參議)ㆍ도승지(都承旨) 등을 거쳐 강원도(江原道) 관찰사를 지냈다. 유성증(兪省曾)의 두 아들과, 그리고 그 재종질은 인조11년 한 해에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유계는 신독재(愼獨齎)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호를 시남(市南)이라 하며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 등과 더불어 충청도 산림오현(忠淸道山林五賢)이라 불린다. 그는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림천(林川)에 유배되고 효종(孝宗) 초에는 인조(仁祖)의 시호(諡號)문제로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가 방면된 후 학문과 저술에 전념했다. 현종(顯宗) 초에는 예론(禮論)시비에 송시열과 동조했으며 도덕ㆍ절의ㆍ학문ㆍ문장에 있어 세인의 추앙을 받아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諡號)로 전국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강거문답’ㆍ‘가례원소’ㆍ‘시남집’ 등이 남아있다.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시대에 기계인은 황금기를 맞는다. 유석기는 영조(英祖) 15년 우의정이 되고 이어 영의정에 이르러 영조(英祖) 중흥사업의 주역이 되었으며 30년간 노론(老論)집권당의 영수로 군림했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이에 그치지 않고 종질 유언호 서서 윤노ㆍ조중매 등을 통하여 정조시대 노론청류파(老論淸流派)로 이어졌다. 호는 지수재(知守齎) 유언호는 호당(湖堂)에 뽑힌 존재일 뿐만 아니라 백부 유최기(兪最基)ㆍ당숙 유석기의 후광을 받아 정조(正祖) 초에 새로 설치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규장각(奎章閣)의 후광을 받아 정조초에 새로 설치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규장각(奎章閣)의 직제학(直提學) 으로서 정조의 신임을 크게받앗다. 그는 개성류수(開城留守)로 자원, 부임하여 곤궁에 빠진 연암 박지원 (軟巖朴趾源)을 구해주기도 했다. 유언호는 정조(正祖)조정에 배향까지 되었다. 기계유씨는 조선조(朝鮮朝)에서 문과급제84명, 태상신 3명, 판서 12명을 기록했다. 뿐만아니라 기계인은 학문과 서화에서도 쟁쟁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특히 학문에 있어 시남유계(市南兪棨)를 비롯하여 겸산유숙기(兼山兪肅基)ㆍ대재유언집(大齋兪彦鏶)ㆍ봉첩유신환(鳳捷兪莘煥) 등은 후계유씨 일문(一門)의 4대유학자(儒學者) 일뿐 아니라 우리나라 유학사(儒學史)에 찬연한 업적을 남긴 석학들이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서유견문(西遊見聞)의 필자 구당유길준(矩堂兪吉준)을 들수 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풍운이 소용돌이 치던 조선말기 이 땅의 선각자로 일본과 미국유학생1호를 기록한 것이 유길준이었다. 그는 갑오경장 후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음력폐지, 종두법시행, 우편제도 실시, 단발령 등 개혁정책을 수행했다. 그 뒤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내각이 붕괴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907년 순종(純宗)의 특사령으로 귀국, 흥사단을 창설, 교육과 계몽을 선도하고 국민경제 자활운동에 앞장 섰다. 그가 일찍이 미국유학에서 귀국하였을 때 보수파에 의해 구금되어 포장한규과(捕將韓圭?)의 집에 유폐되었다가 백록동 취운정(白鹿洞 翠雲亭) 으로 옮겨 이곳에서 서유견문(西遊見聞)등 많은 명작(名作)을 저술했다. 또 현대에 이르러서는 유진오(兪鎭午)가 법학(法學)과 문학에 개척자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헌법(憲法)을 기초하여 건국(建國)에 공헌했으며 교육자(敎育者)로서, 정치인(政治人)으로서 큰 업적을 남겨 한국현대사(現代史)의 거목(巨木)으로 우뚝하다.
항렬표(行列表)
자(字) |
한漢○ |
○주柱 |
○환煥 |
치致○ |
진鎭○ |
○승承 ○준濬 |
○겸兼 ○목穆 ○근根 |
병炳○ ○충忠 ○성星 ○재載 ○재在 |
○선善 ○조朝 |
○호浩 ○연淵 |
○모模 |
○섭燮 |
○균均 |
○호鎬 |
원源○ |
○동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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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주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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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 유의신(兪義臣)(호장(戶長)) 유여해(兪汝諧)(주부(主簿)) 유암무(兪庵務)(동정(同正)) 유득선(兪得瑄)(좌복야(左僕射)) 유득주(兪得珠)(주부(主簿)) 유선(兪선)(판도참서(版圖判書)) 유승계(兪承桂)(판도참서(版圖判書)) 유성복(兪成福)(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유성리(兪成利)(군기사사(軍器寺事)) 유승추(兪承樞)(전서첨의평리(典書僉議評理)) 유천경(兪千慶)(전서(典書)) 유성보(兪成保)(부의(副醫))
▲조선조 유효통(兪孝通)(태종조 직제학(太宗朝 直提學)) 유응부(兪應孚)((세종조 동지중추원사(世祖朝 同知中樞院事) 유진(兪鎭)((부제학(副提學)) 유호인(乳好仁)(세종조 장령(世宗朝 掌令)) 유기창(兪起昌)(중종조 첨지중추부사(中宗朝 僉知中樞府事)) 유여임(兪汝瀮)(중종조 판서(中宗朝 判書)) 유여주(乳汝舟)(중종조 학자(中宗朝 學者)) 유강(兪絳)(중종조 판서(中宗朝 判書)) 유홍(兪泓)(선종조 좌의정(宣宗朝 左議政)) 유대수(兪大修)(선종조부사(宣宗朝 府使)) 유대기(兪大祺)(동지중추(同知中樞)) 유대경(兪大儆)(명종조 군수(明宗朝 郡守)) 유대진(兪大進)(선종조 이조참의(宣宗朝 吏曹參議)) 유대정(兪大정)(광해군 참판(光海君 參判)) 유대일(兪大逸)(인조조 동지교영부사(仁祖朝 同知敦寧府使)) 유대건(兪大建)(대사간(大司諫)) 유백증(兪伯曾)(선조조 이조참판(宣祖朝 吏曹參判)) 유성증(兪省曾)(선종조 관찰사(宣祖朝 觀察使) 유수증(兪守曾)(인조조 장령(仁祖朝 掌令)) 유선증(兪善曾)(군수(郡守)) 유황(兪榥)(효종조 관찰사(孝宗朝 觀察使)) 유철(兪㯙)(경종조 대사헌(景宗朝 大司憲)) 유계(兪棨)(참판(參判)) 유헌(兪櫶)(참판(參判)) 유하익(兪夏益)(숙종조 판서(肅宗朝 判書)) 유하겸(兪夏兼)(승지(承旨)) 유명일(兪命一)(경종조동부승지(景宗朝 同副承旨)) 유명웅(兪命雄)(경종조판서(景宗朝 判書)) 유명홍(兪明弘)(영조조판서(英祖朝 判書)) 유명의(관찰사(觀察使)) 유명악(兪命岳)(숙종조 목사(肅宗朝 牧使)) 유정기(兪鼎基)(참군(參軍)) 유척기(兪拓基)(영조조 영의정(英祖朝 領議政)) 유상기(兪相基)(숙종조 현령(肅宗朝 縣令)) 유광기(兪廣基)(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유최기(兪最基)(영조조 우참찬(英祖朝 右參贊)) 유숙기(兪肅基)(영조조 첨정(英祖朝 僉正)) 유언호(兪彦鎬)(영조조 좌의정(英祖朝 左議政)) 유언술(兪彦述)(영조조 대사헌(英祖朝 大司憲)) 유언미(兪彦微)(군수(郡守)) 유언민(兪彦民)(영조조 대사헌(英祖朝 大司憲)) 유음(兪蔭)(장위랑(將位郞)) 유수학(兪受學)(판관(判官)) 유순(兪洵)(현령(縣令)) 유백환(兪百煥)(동후령(同敦令)) 유노증(兪魯曾)(직장(直長)) 유비(兪柲)(군수(郡守)) 유임중(兪任重)(군수(郡守)) 유처중(兪處重)(군수(郡守)) 유도중(兪道重)(현감(縣監)) 유진(兪縝)(부사(府使)) 유대숙(兪大俶)(감찰(監察)) 유언종(兪彦宗)(현감(縣監)) 유명흥(兪命興)(정랑(正郞)) 유하기(兪夏基)(군수(郡守)) 유주기(兪冑基)(부총관(副摠管)) 유언용(兪彦容)(현감(縣監)) 유면증(兪勉曾)(현령(縣令)) 유득증(兪得曾)(현감(縣監)) 유대우(兪大佑)(현감(縣監)) 유언지 목사(牧使)) 유언철(兪彦哲)(목사(牧使)) 유한기(兪漢紀)(부사(府使)) 유병주(兪秉柱)(목사(牧使)) 유영환(兪永煥)(현감(縣監)) 유한순(兪漢純)(현감(縣監)) 유성식(兪星植)(현감(縣監)) 유억기(兪億基)(지추(知樞)) 유한응(兪漢膺)(현감(縣監)) 유대술(兪大述)(첨정(僉正)) 유찬증(兪纘曾)(정랑(正郞)) 유방(兪枋)(사의(司議)) 유참(兪槮)(정랑(正郞)) 유명익(兪命益)(군수(郡守)) 유한보(兪漢輔)(현감(縣監)) 유영(兪泳)(군수(郡守)) 유대형(兪大衡)(군수(郡守)) 유정기(兪靖基)(판관(判官)) 유한길(兪漢吉)(서윤(庶尹)) 유정주(兪靖柱)(현감(縣監)) 유치홍(兪致弘)(부사(府使)) 유언용(兪彦鏞)(현감(縣監)) 유언제(兪彦銻)(목사(牧使)) 유파주(兪碩柱)(목사(牧使)) 유학기(兪學基)(정랑(正郞)) 유한태(兪漢泰)(현령(縣令)) 유명건(兪命健)(목사(牧使)) 유한식(兪漢寔)(목사(牧使)) 유직기(兪直基)(윤랑(尹郞)) 유한관(兪漢寬)(현감(縣監)) 유언준(현령(縣令)) 유건환(兪建煥)(군수(郡守)) 유명악(兪命岳)(목사(牧使)) 유언현(兪彦鉉)(참판(參判)) 유장주(兪長柱)(군수(郡守)) 유언주(兪彦銖)(군수(郡守)) 유정환(兪廷煥)(부사(府使)) 유희증(兪希曾)(군수(郡守)) 유적기(兪迪基)(첨추(僉樞)) 유욱기(兪郁基)(현감(縣監)) 유말기(兪斗基)(서윤(庶尹)) 유한석(兪漢石)(현령(縣令)) 유정(兪椗)(병사(兵使)) 유박(첨중추(僉中樞)) 유은주(兪殷柱)(부사(府使)) 유정주(兪鼎柱)(현감(縣監)) 유혁(兪赫)(동정(同正)) 유원기(兪元基)(군수(郡守)) 유성의(兪誠意)(현령(縣令)) 유협(兪協)(통정(通政)) 유석기(兪碩杞)(참의(參議)) 유성문(兪聖問)(감정(監正)) 유건기(兪健基)(참판(參判)) 유우기(兪宇基)(증지(承旨)) 유언국(兪彦國)(참판(參判)) 유언집(兪彦鏶)(정조조참의(正祖朝ㆍ參議)) 유한상(兪漢尙)(동중추(同中樞)) 유한지(兪漢芝)(영조조서예가(英祖朝ㆍ書藝家)) 유한소(兪漢蕭)(관찰사(觀察使)) 유한모(兪漢謨)(판서(判書)) 유한인(兪漢人)(장령(將令)) 유한영(兪漢寧)(참의(參議)) 유만주(兪晩柱)(학자(學者)) 유화주(兪華柱)(서화가(書畵家)) 유악주(兪岳柱)(대사헌(大司憲)) 유초환(兪初煥)(참의(參議)) 유장환(兪章煥)(판서(判書)) 유신환(兪莘煥)(현감(縣監)) 유성환(兪晟煥)(판서(判書))
▲近世 유만주(兪萬柱)(학자(學者)) 유기환(兪箕煥)(외부대신(外部大臣)) 유창환(兪昌煥)(서예가(書藝家)) 유치선(兪致善)(판서(判書)) 유치봉(兪致鳳)(서화가(書畵家)) 유진오(兪鎭五)(판서(判書)) 유진학(兪鎭學)(참판(參判)) 유진찬(兪鎭贊)(부승선(副承宣)) 유진율(兪鎭律)(항일운동가(抗日運動家)) 유진태(兪鎭泰)(조선일보사장(朝鮮日報社長),항일운동가(抗日運動家)) 유길준(兪吉濬)(내부대신(內部大臣)) 유성준(兪星濬)(내무협판(內務協辦)) 유정근(兪政根)(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유학근(兪學根)(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유일준(兪日濬)(경성의전교수(京城醫專敎授)) 유만겸(兪萬兼)(경학원부제학(經學院副提學)) 유억겸(兪億兼)(연대총장(延大總長), 문교부장(文敎部長)
등과인명(登科人名)
조선조 문과(文科) 유효통(兪孝通)제학(提學) 유목노(兪牧老)정랑(正郞) 유신노(兪臣老)전적(典籍) 유여림(兪汝霖)예판(禮判) 유중익(兪仲翼)사간(司諫) 유홍(兪泓)좌상(左相) 유대수(兪大修)부사(府使) 유대진(兪大進)참의(參議) 유석증(兪昔曾)전백(全伯) 유학증(兪學曾)원정(院正) 유호증(兪好曾)경도(慶都) 유진증(兪晉曾)승지(承旨) 유대건(兪大建)대간(大諫) 유수증(兪守曾)필선(弼善) 유백증(兪伯曾)이참(吏參) 유성증(兪省曾)강백(江伯) 유황(兪榥)전감(全監) 유계(兪棨)이참(吏參) 유철(兪㯙)대헌(大憲) 유명증(兪名曾)교정(校正) 유하익(兪夏益)예판(禮判) 유헌(兪櫶)예참(禮參) 유장(兪장)승권(承權) 유명정(兪命鼎)승박(承博) 유하겸(兪夏謙)승지(承旨) 유명철(兪命哲)병좌(兵佐) 유명일(兪命一)부윤(府尹) 유명웅(兪命雄)참찬(參贊) 유명홍(兪命弘)예판(禮判) 유세중(兪世重)도사(都事) 유명의(兪命의)경백(慶伯) 유언명(兪彦明)집의(執意) 유세기(兪世基) 유명함(兪命咸)지평(持平) 유척기(兪拓基)영상(領相) 유언통(兪彦通)승지(承旨) 유최기(兪最基)참찬(參贊) 유건기(兪健基)참판(參判) 유안협(兪彦協)정언(正言) 유안국(兪彦國)참판(參判) 유홍관(兪鴻觀)현감(縣監) 유언호(兪彦好)수찬(修撰) 유안술(兪彦述)대헌(大憲) 유우기(兪宇基)승지(承旨) 유한소(兪漢蕭)이참(吏參) 유언민(兪彦民)참판(參判) 유항주(兪恒柱)참판(參判) 유언수(兪彦修)참판(參判) 유언호(兪彦鎬)좌상(左相) 유한근(兪漢謹)교리(校理) 유악주(兪岳柱)대간(大諫) 유한인(兪漢人)장령(掌令) 유한경(兪漢敬)() 유임주(兪任柱)주부(主簿) 유한영(兪漢寧)승지(承旨) 유한우(兪漢寓)옥당(玉堂) 유응환(兪應煥)() 유리환(兪理煥)승지(承旨) 유한종(兪漢宗)교리(校理) 유석환(兪錫煥)참판(參判) 유성환(兪星煥)참판(參判) 유장환(兪章煥)판서(判書) 유상환(兪象煥)교리(校理) 유구환(兪龜煥)참판(參判) 유익환(兪益煥)참판(參判) 유정환(兪貞煥)교리(校理) 유세환(兪世煥)참판(參判) 유효환(兪孝煥)정언(正言) 유승황(兪昇煥)정자(正字) 유성환(兪晟煥)판서(判書) 유초환(兪初煥)승지(承旨) 유치숭(兪致崇)판서(判書) 유치선(兪致善)이판(吏判) 유치범(兪致範)이의(吏議) 유치익(兪致益)참의(參議) 유치열(兪致烈)교리(校理) 유치일(兪致一)응교(應敎) 유진필(兪鎭弼)직각(直閣) 유진규(兪鎭奎)승지(承旨) 유진찬(兪鎭贊)가선(嘉善) 유진오(兪鎭五)판서(判書) 유진옥(兪鎭沃)승지(承旨) 유진학(兪鎭學)참판(參判)
조선조 급제자 정록
효통(孝通)(태종(太宗)8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효통(孝通)(세종9년중시을과일(世宗9年重試乙科一) 목노(牧老)세종21년친시병과(世宗21年親試丙科) 진(鎭)세조8년식시정과(世祖8年式試丁科) 원노(元老)세조12년춘시일등(世祖12年春試一等) 신노(臣老)세조성종2년별시을과(世祖成宗2年別試乙科) 호인(好仁)세종5년식시병과(世宗5年式試丙科)효전(孝全)세종8년식시병과(世宗8年式試丙科)여임(汝임)연산11년별시병과(燕山11年別試丙科)중익(仲翼)중종4년별시병과(中宗4年別試丙科)강(絳)중종36년별시을과(中宗36年別試乙科)홍(泓)명종8년별시병과(明宗8年別試丙科)대수(大修)명종20년알성시병과(明宗20年謁聖試丙科)대진(大進)선조16년무시병과(宣祖16年式試丙科)대정(大정)선조21년무년시병과(宣祖21年式年試丙科)대경(大儆)선조24년별시병과(宣祖24年別試丙科)석증(昔曾)선조30년정시을과(宣祖30年庭試乙科)학증(學曾)선조38년증광시을과(宣祖38年增廣試乙科)호증(好曾)선조38년증광시병과(宣祖38年增廣試丙科)진증(進曾)선조38년증광시병과(宣祖38年增廣試丙科)대건(大建)선조39년증광시병과(宣祖39年增廣試丙科)수증(守曾)선조39년년시을과(宣祖39年年試乙科)백증(伯曾)광해4년증광시병과(光海4年增廣試丙科)성증(省曾)광해11년별시갑과(光海11年別試甲科)황(榥)인조11년시년시병과(仁祖11年式年試丙科)계(棨)인조11식년시을과(仁祖11年式年試乙科)철(㯙)인조식년시11년(仁祖式年試11年)명증(名曾)인조13년증광시병과(仁祖13年增廣試丙科)명유(命유)세종8년식년시병과(世宗8年式年試丙科)하익(夏益)현종1년증광시병과(顯宗1年增廣試丙科)헌(櫶)현종6년정시을과(顯宗6年庭試乙科)장(章)명종7년식년시을과(明宗7年式年試乙科)명정(命鼎)현종12년정시을과(顯宗12年庭試乙科)하겸(夏謙)현종13년별시병과(顯宗13年別試丙科)명철(命哲)현종14년정시을과(顯宗14年庭試乙科)명일(命一)숙종7년알성시병과(肅宗7年謁聖試丙科)명웅(命雄)숙종8년춘광시병과(肅宗8年春廣試丙科)명홍(命弘)숙종8년증광시병과(肅宗8年增廣試丙科)세중(世重)숙종19년알성시을과(肅宗19年謁聖試乙科)명의(命의)숙종20년별시을과(肅宗20年別試乙科)언명(彦明)숙종25년정시을과(肅宗25年庭試乙科)세기(世基)숙종25년증광시을과(肅宗25年增廣試乙科)명함(命咸)숙종33년별시을과(肅宗33年別試乙科)척기(拓基)숙종40년증광시병과(肅宗40年增廣試丙科)언통(彦通)경종1년정시병과(景宗1年庭試丙科)최기(最基)경종3년증광시병과(景宗3年增廣試丙科)건기(健基)영조1년증광시병과(英祖1年增廣試丙科)언협(彦協)영조3년증광시병과(英祖3年增廣試丙科)언국(彦國)영조11년증광시병과(英祖11年增廣試丙科)언호(彦好)영조11년정시병과(英祖11年庭試丙科)언술(彦述)영조12년알성시병과(英祖12年謁聖試丙科)우기(宇基)영조15년정시을과(英祖15年庭試乙科)한소(漢蕭)영조16년증광시병과(英祖16年增廣試丙科)언민(彦民)영조19년정시병과(英祖19年庭試丙科)언술(彦述)영조33년중시을과(英祖33年重試乙科)항주(恒柱)영조35년식년시을과(英祖35年式年試乙科)언수(彦修)영조35년식년시병과(英祖35年式年試丙科)언호(彦鎬)영조37년정시을과(英祖37年庭試乙科)한근(漢謹)영조42년정시병과(英祖42年庭試丙科)악주(岳柱)영조43년알성시병과(英祖43年謁聖試丙科)한인(漢人)영조47년식년시병과(英祖47年式年試丙科)한경(漢敬)영조47년정시병과(英祖47年庭試丙科)임주(任柱)영조52년정시병과(英祖52年庭試丙科)한영(漢寧)정조7년증광시병과(正祖7年增廣試丙科)한우(漢寓)정조13년식년시병과(正祖13年式年試丙科)응환(應煥)정조24년정시병과(正祖24年庭試丙科)리환(理煥)순조1년증광시병과(純祖1年增廣試丙科)승환(昇煥)순조10년식년시병과(純祖10年式年試丙科)장환(章煥)순조26년별시병과(純祖26年別試丙科)상환(象煥)순조27년증광시병과(純祖27年增廣試丙科)성환(星煥)순조28년식년시갑과(純祖28年式年試甲科)세환(世煥)순조28년식년시병과(純祖28年式年試丙科)진오(鎭五)순조29년정시병과(純祖29年庭試丙科)치숭(致崇)순조29년정시병과(純祖29年庭試丙科)석환(錫煥)순조34년식년시병과(純祖34年式年試丙科)교환(敎煥)순조34년식년시병과(純祖34年式年試丙科)정환(貞煥)헌종6년식년시병과(憲宗6年式年試丙科)치선(致善)헌종10년증광시을과(憲宗10年增廣試乙科)성환(晟煥)철종2년정시병과(哲宗2年庭試丙科)치범(致範)철종11년정시병과(哲宗11年庭試丙科)초환(初煥)철종13년정시병과(哲宗13年庭試丙科)익환(益煥)고종3년별시병과(高宗3年別試丙科)진학(鎭學)고종8년정시병과(高宗8年庭試丙科)치일(致一)고종13년식년시병과(高宗13年式年試丙科)진규(鎭奎)고종16년정시병과(高宗16年庭試丙科)진필(鎭弼)고종16년식년시병과(高宗16年式年試丙科)진려(鎭려)고종17년증광시갑과(高宗17年增廣試甲科)치열(致烈)고종19년증광시병과(高宗19年增廣試丙科)치익(致益)고종22년증광시갑과(高宗22年增廣試甲科)구환(龜煥)고종25년기노과갑과(高宗25年耆老科甲科)진찬(鎭贊)고종25년정시병과(高宗25年庭試丙科)
벌열(閥閱) 상신(相臣): 유홍(兪泓)선조조좌의정(宣祖朝左議政) 유척기(兪拓基)영조조영의정(英祖朝領議政) 유언호(兪彦鎬)정조조좌의정(正祖朝左議政) 공신(功臣): 유홍(兪泓)선조조정여입옥사2등공신선조조종계변무1등공신(宣祖朝鄭汝立獄事2等功臣宣祖朝宗系辨誣1等功臣) 유백증(兪伯曾)인조조인조판정(仁祖朝仁祖反正3等功臣)
호당(湖堂): 유언호(兪彦鎬)좌의정(左議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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